‘대기업에서 아마존처럼 일하기’ 3편 — ‘서술형 에세이로 PPT 대체하기’

1편에서 ‘제 윗선의 승인이 필요한 보고 자료는 어쩔수 없이 PPT로 계속 만들어야겠지만, 제가 의사결정할 수 있는 건이라면 PPT 작성하는데 절대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제안, 실행을 했다고 말씀드렸죠. 이번에는 제 윗선에 올리는 보고서도 아마존식 서술형 에세이로 바꾸어본 경험을 공유드리고자 합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파워포인트는 매우 애매모호하다, bullet point 사이에 숨기 쉽고 생각을 완전히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PPT 사용을 금지하고 워드에 주어/동사/목적어가 분명한 서술형 산문 형태로, 깊이 생각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한 문장을 쓰도록 했습니다. 그 후 예전의 아마존이나 다른 기업처럼 누군가 일어서서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아닌, 회의의 발제자가 자신의 문서를 나눠주고 모두 조용히 앉아 15분 정도 서류를 읽고, 각 페이지별로 질문 및 토론을 하는 형태로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6장으로 분량이 제한되어있어 ‘6 pager’라고 부르는 아마존의 문서는 1)소개 2)목적 3)팀의 운영 원칙 4)비즈니스 현황 5)Lesson Learned 6)전략적 우선순위 제안 및 논의 등의 순서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주간 업무 보고 등의 경우에도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서술형으로 써서 이메일로 공유한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6 Pager 작성 시 유의 사항은 ‘모호한 형용사/부사를 사용하지말고 데이터로 표현할 것 (예: 대폭 상승 -> 전년 동기 대비 X.X% 상승)’,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왜곡이 가능한 그래프 사용을 금지하고 데이터는 표로만 넣을 것’ ‘주어와 목적어가 불분명한 bullet point 사용 최소화’ 등이 있었습니다.

(source)

2016년 11월 아마존에 입사해서 첫 미팅에 들어갔을 때, 회의 진행자가 문서를 나눠주고 20분 동안 조용히 문서를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긴 침묵이 있는 회의는 처음이라 굉장히 숨막혔고, 비즈니스 상황은 커녕 다양한 내부 용어들을 모르는 상황이라 20분 동안 문서를 다 소화하지도 못 했는데, 읽는 시간을 마친뒤 열정적인 질문과 토론이 시작되어 굉장히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가 작성자가 되었을 때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논리를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는 등 굉장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팅을 4년동안 진행하고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점차 익숙해졌죠. 정말 놀라운 점은 전세계 아마존의 모든 부서들이 같은 방식으로 문서를 쓰고, 회의를 한다는 점입니다.

이 6 Pager의 장점은
1)논리적인 생각 정리가 필수이며, 이미지나 그래프로 적당히 공간을 채울수 없다
2)발표없이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뒤 회의를 진행하므로, 시간이 절약되고 발제자의 전체 생각을 이해한 다음에 깊이있는 토론을 할 수 있다
3)발표자의 언변이 아닌 작성자의 논리가 중요하다, 적당히 ‘말발’로 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4)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문서만 공유받아 읽어보면 해당 팀/프로젝트의 계획이나 비즈니스 현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등이 있습니다.

이런 장점을 경험한뒤 다시 PPT 기반의 보고서 작성/발표 문화로 돌아오니, 문서의 본질이 아닌 포맷에 신경써야 하는 점과, 제 생각을 100% 전달하기 어렵다는 점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LG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면서, 일부 보고서의 executive summary를 에세이 방식으로 쓰는 경우들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마침 작년에 제가 맡고 있는 부서의 23년 업무 계획을 사업부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었는데, 먼저 큰 방향성을 말씀드렸더니 상세한 내용은 에세이 방식으로 깊게 고민하면서 써보라는 권유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조직 구성원 전체 워크샵을 통해 최근 몇년간 우리가 했던 일들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개선/보완해야할 일과 전략적인 고민이 필요한 건들에 대해 하루 종일 논의를 한 뒤, 그 내용을 토대로 23년 업무 계획을 서술형 문장으로 작성했습니다. 사실 전략안에 들어갈 내용은 아마존이나 LG나 유사합니다. 조직의 목표를 정의하고, 과거에 했던 일에서 얻은 lesson learn을 기반으로 내년에 해야 할 프로젝트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 프로젝트들에 대한 상세 계획을 세우는 것이죠. 서술형으로 포맷에 구애받지 않고 각 프로젝트별로 꼭 필요한 내용을 적고, PPT에는 적기 어려웠던 저와 우리 조직원들의 고민 사항과 어려움, 그리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지 등을 자세히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존에서는 영어로 써야했는데 한국어로 쓰니 훨씬 빠르게 쓸 수 있더군요 :)

이렇게 워드 4장 분량의 에세이를 작성하여 제 보스분들께 미팅 전에 사전 공유를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내용을 모두 읽어보시고 들어오셨고, 제 고민과 생각이 잘 이해가 되었다고 하셔서, 미팅 시간을 우선 순위 및 중요한 의사 결정 사항에 대한 논의 위주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팅 후 에세이를 제 팀원들에게 바로 공유했고, 팀원분들도 에세이를 읽고 우리 조직의 23년 전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조직의 리더시라면, 조직의 전략을 수립하실 때 먼저 에세이 형태로 작성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보고를 위해 나중에 PPT로 만들게 되더라도, 에세이를 조직원들에게 공유하신다면 전략 소통에 큰 도움이 되실 거라고 믿습니다.

--

--

진민규의 마케팅/Tech 이야기

Vice President@LG Display I Ex-Amazon, Google, Riot Games I Marketing, Tech, 글쓰기, 기업 문화 등에 관심이 많은 비즈니스맨 I https://www.linkedin.com/in/justinmkjin/